“너 이거 학원 안 다니면 못 따라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가 했던 말이다. 당시 우리는 수능 국어 비문학 문제를 푸는 중이었고, 난 문제를 넘기기만 했지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선생님 설명보다 빠르게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독해력, 배경지식, 추론력. 모든 게 부족했다.
결국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학원을 등록했다. 그렇게 시작된 내 사교육 생활은 대학 입시가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게 과연 정상인가, 그런 질문을 한 건 나중 일이었다.
1. 교육 공화국, 그 빛과 그림자
대한민국은 ‘교육 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교육에 열정적이다. 교육열은 부모 세대에서부터 이어졌고, 대학 진학률은 OECD 국가 중 상위권을 꾸준히 유지해왔다. 그러나 그만큼 치열한 경쟁, 사교육 의존, 심리적 피로도가 뒤따랐다.
내가 겪은 입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3이 되면 학교 수업은 ‘형식’이었고, 진짜 공부는 야간 자율학습 후 시작됐다. 친구들은 오후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수학 문제를 풀고, 온라인 강의를 틀고, 카페에 모여 모의고사를 비교했다.
그 과정에서 빠지는 사람은 낙오자가 되었고,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거야”라는 말이 당연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아닌, 출발선의 차이를 복제하는 도구로 변하고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2. 사교육 공화국 – 필수인가, 선택인가
교육에 있어서 가장 불편한 진실 중 하나는, ‘공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이다. 학원, 인강, 과외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초중고생의 약 80% 이상이 사교육을 받고 있다.
하지만 사교육은 결국 부모의 경제력과 연결된다. 나와 같은 중산층 가정에서도 ‘어디까지 투자해야 하나’가 늘 고민이었다. 주변 친구 중에는 서울로 과외를 받으러 다니는 아이도 있었고, 1:1 맞춤형 프로그램에 수백만 원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영어와 수학 두 과목을 집중해서 했지만, 그 외 과목은 사교육 없이 스스로 공부해야 했다. 문제는, 입시는 모든 과목의 총합이라는 것이다. 결국 사교육의 범위가 곧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현실 앞에서, 교육은 점점 불평등을 내재한 구조로 굳어지고 있었다.
3. AI 시대, 새로운 교육 격차의 출현
최근 교육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변화는 ‘AI 학습’의 도입이다. 챗봇을 이용한 질문 응답, AI 튜터의 개별 피드백, 빅데이터 기반 학습 분석 등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몇몇 학교에서는 AI 기반 학습 관리 프로그램을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시키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또 다른 격차가 있다. 먼저 디지털 기기의 접근성. 태블릿, 고성능 노트북, 인터넷 환경 등은 모두 가정의 경제력과 연결되어 있다. 또 하나는 ‘정보 격차’다. 어떤 부모는 자녀의 AI 학습 관리를 적극적으로 돕고, 어떤 부모는 그 존재조차 잘 모른다.
내가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했던 학생 중 한 명은, AI 기반 플랫폼을 전혀 접해보지 못한 상태였다. 같은 또래인데도, 누군가는 AI 추천에 따라 문제를 풀고 있고, 누군가는 여전히 학습지 한 장을 붙잡고 있는 현실. 우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격차’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4. 시험의 무게, 삶의 균형을 잃다
한 가지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수능 직후였는데, 친구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뭐 하지?”
입시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시간 동안, 우리는 삶의 다른 영역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다. 독서, 운동, 친구들과의 여행, 자율적인 탐구. 입시 중심의 교육은 우리를 ‘점수로 환산 가능한 인간’으로 훈련시켰고, 수능이 끝난 후 우리는 방향을 잃는다.
이 문제는 비단 청소년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대학에서도, 졸업 이후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 토익 점수, 자격증, 인턴 경력. 교육이 삶의 도구가 아니라, 삶을 소진시키는 구조가 된 것이다.
결론: 교육이 다시 삶의 중심이 되려면
나는 여전히 배움을 좋아한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때의 희열, 질문이 풀릴 때의 쾌감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점수와 경쟁, 불평등으로 이어질 때, 교육은 ‘가능성’이 아니라 ‘피로감’으로 변한다.
우리에겐 새로운 교육 철학이 필요하다. 삶의 맥락 속에서 배우고, 질문하고, 탐구할 수 있는 구조. 공교육이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안내자가 되는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든 자신만의 속도로 배울 수 있다는 믿음.
교육 공화국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방향은 이제 우리 스스로가 정해야 할 때다.
📌 다음 편 예고
👉 11편. 디지털 시민의 조건 – 혐오와 가짜 뉴스 속에서 살아남기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윤리, 표현의 자유와 혐오의 경계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 본 글은 필자의 입시 경험과 교육 현장 체험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