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젠더 갈등’이라는 단어를 피부로 느낀 건 대학 1학년, 수업 후 이어진 조별과제 토론 자리에서였다. 한 조원이 “요즘은 여자들이 너무 특혜를 받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가볍게 넘기지 못하고 며칠 동안 마음속에서 자꾸 되뇌게 되었다.
왜 그 말이 그렇게 마음에 걸렸을까. 그날 이후로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장면들을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다.
1. 아무도 말하지 않던 장면들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던 어느 날이었다. 길가에 앉아 있던 한 남성이 우리를 향해 대놓고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예쁜 학생들~ 어디 가?”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그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냥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지금 생각하면 명백한 성희롱이었지만, 그 순간 나는 그저 ‘민망한 상황’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한 번이 아니었다. 지하철에서, 아르바이트 가게에서, SNS DM함에서. 말로 하기 힘든 종류의 불쾌함과 위협감이 쌓여갔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친구들과 나누면, “너만 겪은 거 아니야”, “그런 건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말하지 않게 되었고, 말하지 않으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2. ‘역차별’이라는 말의 무게
대학에 와서, ‘페미니즘’이나 ‘성평등’이라는 주제가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남자는 다 죄인인가?”,
“여자들만 배려받는 사회가 공정한가?”라는 반론도 거세졌다.
특히 남학생 몇몇은 “군대 갔다 온 보상이 없다”, “여성 가산점이 부당하다”, “여자들은 선택적 페미니스트”라며 불만을 표출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고민했다. 이건 단순히 남녀 간의 대결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다른 종류의 억울함’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겪는 구조적 차별, 남성들이 감내하는 의무와 기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각자의 고통만을 내세우는 일이 반복됐다.
‘역차별’이라는 말은 그렇게 탄생했지만, 그 말은 사실상 ‘차별의 상대성’을 주장하면서도 구조적 불평등을 지우는 위험성도 있었다...
3. 인터넷 속, 익명 뒤의 전쟁
어느 날 밤, 나는 커뮤니티에 올라온 젠더 이슈 게시글을 우연히 보게 됐다. 내용은 한 여성 작가가 쓴 칼럼에 대한 악성 댓글들이었다.
“이래서 여자들은 안 돼.” “또 피해자 코스프레하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혜택받는 주제에.”
몇 시간 동안 댓글을 읽다가 불쾌함, 분노, 혼란이 뒤섞였다. 이건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분명 어딘가에선 상처받은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더 씁쓸했다. 익명성은 인간의 본심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이해보다 혐오를 더 빠르게 확산시킨다는 걸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4. 진짜 문제는 ‘말할 수 없는 분위기’
젠더 문제는 사실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고 들을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어떤 이슈든 조심스럽다. 페미니즘 이야기를 꺼냈다가 바로 “페미냐?”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남성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면 “남초 커뮤니티에서 왔냐?”는 시선을 받기도 한다.
정작 중요한 건, 그런 말을 꺼낼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다. 우리는 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 이해는 대화에서 시작되니까.
결론 – 서로 다른 경험을 말할 수 있는 용기
나는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완벽한 답을 갖고 있진 않다. 하지만 분명한 건, ‘겪은 사람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그 경험을 무시하지 않고 공감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평등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다른 출발선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젠더 논쟁은 지금도, 인터넷 어딘가에서 불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불이 누군가를 태우는 대신, 서로를 조금 더 따뜻하게 비출 수 있는 작은 촛불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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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글쓴이의 경험과 주변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서사적 에세이입니다.